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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8주간 수요일> 그 많던 예언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위례성모승천성당 0 32 10.16 10:32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그 많던 예언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복    음 : 루카 11,42-46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어제에 이어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날카롭고 격양된 목소리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여러 차례 야단치고 계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루카 11,42.43.44.)
이번 주간 내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 집중적으로 야단을 맞는데 그 야단의 정도가 저주에 가까울 정도로 심합니다. 도대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어떤 사람들이어서 이렇게 야단을 맞고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성경를 읽다보면 구약의 시대는 예언자들의 시대라고 할 정도로 많은 예언자들을 접하게 됩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로 넘어오면서 어느 순간에 그 많던 예언자들이 모두 사라지고 특히 예수님 시대에는 예언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대신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등장하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은 그들이 예수님께 호되게 야단을 맞는 장면이 그려지고 있지요. 그 많던 예언자들이 다 사라지고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 또 사두가이들이 등장하게 된 이유를 알아야 우리는 성경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천주교는 계시(啓示)종교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고, 우리가 응답할 수 있게 비추시고 인도하시는 가운데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사물이나 사람, 사건, 자연이나 꿈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시지요. 성경는 이렇게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고 이에 응답하는 인간의 행적을 적은 기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 시대에 계시의 한 방법으로 예언자들이 선택되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창조 사업이 시작되던 처음부터 예언자들의 활동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집트에서 노예살이를 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해내기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보내시는데 바로 모세와 아론입니다. 후에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전하러 간 모세를 첫 번째 예언자라고도 부르기도 하지요. 모세와 아론은 하느님의 뜻을 끊임없이 묻고 그 뜻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는 중개자 역할을 합니다. 그런 한편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직접 드러내기도 하십니다.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며 당신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끌고 가시지요.
   시나이산에 이르러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백성으로 맞으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 하느님을 유일한 하느님으로 섬기겠다는 약속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로부터 열 가지 계명, 즉 십계명을 받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지침들이 보이는 것으로 드러난 순간입니다.


   광야 생활 후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당도하게 되고 부족 국가를 이루어 갑니다. 부족 국가 시대에는 판관들이 어려움에서 동족을 구해내는 역할을 충실히 하지요. 기드온, 드보라, 입다, 삼손 등이 활약한 약 200년간의 판관시대를 거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왕을 중심으로    12부족이 통일되는 통일국가 시대를 맞게 됩니다.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여 통일 왕국이 만들어지고 왕정 시대가 이어지는데 이 때 이어지는 왕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해 주는 메신저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바로 예언자들이지요.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고 따르지 않는 왕들이 늘어나면서 예언자들의 활약도 점점 커져만 갔습니다. 이스라엘 왕들이 극도로 이기적인 정치를 펴고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는 타락한 생활을 하게 되면서 나라는 존폐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다윗의 뒤를 이은 솔로몬왕이 죽자 이스라엘은 두 나라로, 즉 사마리아를 수도로 삼은 북부 이스라엘 왕국과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은 남부 유다 왕국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사마리아는 B.C. 722년에 앗시리아에 의하여, 예루살렘은 B.C.587년에 바빌로니아에 의하여 멸망하였습니다.


   이렇게 나라가 위태로울 때 예언자들은 목숨을 걸고 끊임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나섰지만 왕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마다 예언자들은 끊임없이 경고를 하고 독설을 퍼부으며 왕들에게는 회개할 것을, 그리고 백성들에게는 하느님의 뜻을 따를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결국 통일 왕국은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고 이웃 나라에 의해 패망하고 말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노예 생활을 하게 됩니다.
   바빌론 유배 생활부터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그 내용을 달리하지요. 왕들의 정치 활동을 감독하고 비판하며 회개와 정의를 위하여 갖은 독설을 다 쏟던 그들의 입에서 이제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가 흘러나왔던 것입니다. 이 때부터 예언자들에 의해 하느님의 말씀을 잘 따르면 하느님께서 제 2의 모세를 보내주실 것이고 메시아를 보내시어 제 2의 출애굽을 이루어주실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가 끊임없이 전해집니다.


   한편 바빌론에 노예로 끌려가 있던 이스라엘의 많은 식자(識者)들은 왜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지켜주지 않으셨는지를 연구하고 반성한 결과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기에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지킨다면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어 제 2의 출애굽을 맞게 되리라고 그들은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레위 지파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동안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전해지던 여러 기록들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기록들을 모으면서 성경를 편집하고, 기원 전 5C에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즉 모세 오경이 쓰여지게 됩니다. 마침내 하느님의 말씀이 생겨난 것이지요.
   구약성서는 조각조각 내려오던 말씀의 기록들이 거의 600여 년의 시간이 지나서 이렇게 편집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언자들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던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이 문서화 되면서 역사 저편으로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하여 말씀을 해석해 주는 율법 학자들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예언자의 시대는 하느님의 말씀이 자리 잡아가면서 사라져가고 하느님의 계시가 이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 의해서 해석되고 가르쳐지게 된 것입니다.


   바빌론 유배 이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양과 비둘기를 잡아 바치며 하느님을 찾는 제사 중심의 삶을 살았지만,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파괴된 이후로 말씀이 정립되자 말씀 중심의 삶으로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특히 에즈라 예언자가 제사에서 말씀 중심의 삶을 외치면서 이스라엘의 식자 중에서도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모여서 말씀 중심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리사이들 중에 좀 더 율법을 공부한 사람들이 율법 학자들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서로 호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상당수의 율법 학자들이 바리사이들이기도 하였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당시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얻어 가고 있었지요. 그들은 뛰어난 성경 주석가였으며, 법률과 관리와 교육 전문가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했고 회당과 학교에서 말씀을 설명하고 가르쳤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한 주에 두 번씩 단식을 하고 수입의 십분의 일을 하느님께 바쳤으며 부정 타지 않게 말씀들을 지키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던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이 예수님 시대에 호된 야단을 맞고 있습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 해석을 독점함으로써 백성의 영신적 지도자를 자처하면서 서서히 타성에 젖기 시작한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가르치며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나라를 만들고 하느님 구원 계획을 실현시키겠다는 처음의 정신은 점차 생활에 물들어가고 이제는 새로운 것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려고 하는 안일한 지배계급으로 변질되어 갔던 것이지요.
   율법 학자들은 성경 말씀에 수 천 가지 세부 규정들을 만들어 붙였습니다. 그리고 지킬 것을 강요했지요. 이제는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이들이 만든 율법의 세부 규정이 사람들을 억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율법 학자들이 만들어낸 세부 규정을 지키면 구원을 받을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는 현실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구원의 기준이 하느님에서 율법으로, 그리고 율법에서 세부 규정으로 넘어가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리고 여기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놓친 것이 있습니다. 세부 규정에 지나치게 얽매이다 보니 율법의 근본정신으로 끊임없이 강조하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정신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세부 규칙이 사람을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단죄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율법이 이제는 이웃을 판단하고 죄인으로 만드는 기준으로 변질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런 현실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져 가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마저도 율법의 잣대로 심판하기에 이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율법의 파괴자, 하느님의 뜻을 어긴 사람으로 몰아가고 하느님을 모독한 자로 끝내 처형시키고 말지요. 율법이 도리어 하느님을 처형하고만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정신은 사라지고 법만이 남아 사람 잡는 도구로 전락한 것을 아신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거듭 야단치며 가르치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모습은 우리들에게도 찾아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타성에 젖을 수가 있습니다. 신앙 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이기가 쉽습니다. ‘저 신부님이 오면 오시나보다, 가면 가시나보다, 이 수녀님이 이러면 이런가 보다, 단체장이 바뀌면 바뀌나 보다’하는 식으로 마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율법의 세부 규정만을 바라보고 거기에 매달린 채 예수님의 새로운 말씀을 끝내 놓쳐버린 것과 같이 고여 있기가 쉽지요. 우리가 경계해야 할 대목입니다. 끊임없이 새롭게 변화되고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는다면 우리 또한 예수님께 호된 꾸지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세례를 받은 지 오래되고 나름대로 터주대감 노릇을 하면서 새롭고 열심한 사람들을 말 한 마디로 넘어뜨리는 원로 아닌 원로들이 성당마다 있습니다. 오늘 율법 학자들이 야단맞은 이유이지요. 우리는 매일 새로워져야 합니다. 신앙이 깊을수록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숙해갈 때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모습을 보고 하느님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신앙 생활을 오래 하신 분도 계시고, 단체장이나 사목위원 등 봉사를 많이 하신 분도 계시며, 이제 막 신앙 생활을 시작하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힘들어하는 이웃에게 희망과 위로로써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는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공동체의 모습일 것입니다. 이것이 그 어떤 법률보다도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