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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8주간 목요일> 깨어 있는 자의 행복

위례성모승천성당 0 27 10.17 11:10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깨어 있는 자의 행복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의 초대에 응하셔서 그들의 집에 식사를 가셨다는 것이 의외일 뿐만 아니라, 또 계속해서 저주에 가까운 책망을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퍼부으십니다.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루카11,43)고 그들의 본모습을 폭로하신 예수님은 오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본인들의 악행뿐만 아니라 조상들의 피의 책임까지 져야한다고 거듭 말씀하고 계십니다.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루카11,50)

그 결과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루카11,53) 예수님에 관한 트집을 잡으려고 혈안이 됩니다. 그리고 세상의 권력자였던 그들의 교묘한 악행으로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길을 가실 수밖에 없었지요. 한편 이런 생각이 듭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 시대에 오신다면 우리는 그 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느님을 잘 안다는 사람들이 하느님이신 그 분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처형했는데 우리는 안 그럴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지금 이 시대에 오신다면 이천여 년 전의 유다인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으리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을 것 같지 않습니다. 우리 시대에 오신 예수님은 아마도 여러 가지 이유로 살아남기가 쉽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반체제 인사로 혹은 권위에 대한 도전자로, 또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는 모리배로 낙인이 찍혀서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이 내세운 죄목 위에 오히려 몇 개의 죄목이 더 얹혀진 채 사라져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되셨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 학자들보다도 못한 것이 이 시대요, 우리들이며, 또 내 자신이 아닌가 하는 안타까운 생각은 율법 학자들을 향한 저주에 가까운 예수님의 꾸짖음이 그대로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은 아닐까 하여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을 호되게 야단치시고 그들의 조상들까지도 들춰내시면서 인류의 첫 희생자 아벨의 피에서 최근에 죽은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 책임을 져야 한다고 몰아붙이십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어간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루카11,47-51)

율법 학자들의 조상인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진리를 설파했던 예언자들을 살해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세월이 흘러 살해된 예언자들의 무덤을 장식하며 희생된 예언자들을 기리고 있는 그 후손인 율법 학자들은 구약시대의 예언자들보다도 훨씬 더 위대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도 고대하던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까지도 죽이려 하고 있지요. 예언자들을 죽인 과거의 조상들보다도 훨씬 더 엄청난 잘못을 그들이 저지르고 있음을 오늘 예수님께서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사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하느님을 따르고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려고 애썼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사실 가장 비복음적인 삶을 사는 대표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희생된 예언자들을 추모하며 무덤을 꾸미고 순례했지만 사실은 그 조상들보다도 더 못된 짓을 저질렀지요. 이는 열심한 사람들이 빠지지 말아야할 함정입니다. 하느님을 알아가고 지식이 축적될수록 삶 안에서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바리사이들과 별반 차이가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타성에 젖어 자신의 이익과 안일에 빠져들기가 쉽지요.

여러 단체 활동과 교육 등에 참여하며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어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매일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가 자리잡게 됩니다. 여러 지식과 경험이 오히려 나를 키우고 나를 앞세우게 만들 뿐이지요.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지식과 경험을 앞세워 하느님과 사람을 판단하는 그릇된 모습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입니다. 결실의 계절인 가을이 되어도 익지 않은 쭉정이는 고개를 숙이지 않지요.

우리가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복음 말씀으로 나를 깨우고 하느님께서 내 삶을 끌어가시도록 온전히 내맡길 때 우리는 참 자유와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끊임없이 새로워질 수가 있을까요? 매일 미사 참례가 중요합니다. 그 날의 복음 말씀으로 끊임없이 나를 정화시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거리가 먼 생각이나 행위를 하고 있다면 매일 매일의 복음 말씀이 나를 정화시켜 마침내 하느님의 뜻을 찾게해줄 것입니다.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나의 욕망과 이기심이 드러나게 되면 그 관계는 어려워지게 마련입니다. 끊임없이 정화하면서 함께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신앙 생활도 열심히 하고 여러 가지 신심활동을 하지만 철옹성같이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공동체 활동도 하지 않지요. 이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의 신앙은 개인의 구원이 아닌 둘이나 셋이 함께 모여 가꾸어가는 공동체 신앙입니다. 신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입니다. 사목 활동을 하다 보면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은 항상 그렇게 주위에 아랑곳 않고 혼자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랫동안 신앙 생활을 하였고 신부, 수녀들을 많이 안다는 사람들이 오늘 예수님께 야단맞는 율법 학자, 바리사이들처럼 경직될 확률이 높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늘 경계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정화되지 않으면 오늘 예수님이 맹공을 퍼붓는 이천여 년 전의 바리사이들의 모습이 우리 안에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좋은 성당은 외관이 얼마나 멋있으며, 신자들이 얼마나 많고 적은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적인 원로 신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느냐에 좌우됩니다. 참 생명이 숨쉬는 좋은 성당은 하느님 안에서 복음적으로 사는 사람들에 의해 가꾸어지기 때문이지요.

은총이 많으면 유혹도 많습니다. 풍요롭고 건강한 것은 분명 은총이지만 그에 따른 유혹 또한 크게 작용합니다. 건강한 사람은 여러가지 세속적인 일에 눈길을 돌리기가 쉽습니다. 또 풍요로워지면 돈으로 할 수 있는 많은 유혹들이 다가오지요. 직위가 높아지면 주신 은총에 감사하기보다는 교만해지기가 쉬운 것이 우리들 정신의 한계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수록 이웃에 너그러워지고 감사하며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복음적인 삶을 실천하는 개인이 모여 좋은 공동체를 이루고, 그런 공동체가 모여 좋은 성당을 만들어가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노골적으로 신랄하게 화를 내시는 경우도 드물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것들, 신앙의 경력과 이력들이 하느님께로 더 다가가고 겸손하게 나눌 줄 아는 행위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오늘 예수님의 저주에 가까운 책망이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