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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우리가 걸어야 하는 생명의 길

위례성모승천성당 0 43 10.21 08:37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우리가 걸어야 하는 생명의 길

    

 

1독서 : 에페 2,12-22 (하나로 만드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복 음 : 루카 12,35-38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들이 참 많습니다. 예수님, 예수 그리스도, 구세주, 메시아, 사람의 아들, 인자, 천주의 어린양, 하느님의 어린양 등등으로 부르고 제 2의 모세나 새 아담이라고도 부릅니다. 그 명칭마다 각각 지니고 있는 의미들이 다 깊지요. 특히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명칭은 아주 중요한 시점에서 사용합니다.

로마서에서는 직접 호칭은 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을 새 아담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천주의 어린양이라든지 새 아담은 신학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 의미를 알고 또 가슴에 담고 사용하면 더욱 깊이 있는 말씀으로 들려올 것입니다. 예전에는 천주의 어린양으로 부르기도 했던하느님의 어린양은 구약의 출애굽 사건에서 유래한 명칭입니다. 예수님을 양이라고 부른 것이지요. 실은 예수님을 양이라고 부르는 자체가 불경스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예수님을 부르는 이유는 그 의미가 무척 깊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죄를 지어서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거나 또는 감사를 드릴 일이 생기면 제물을 드리며 제사를 올립니다. 이 때 대부분 양을 잡아서 제물로 사용합니다. 지금 우리는 고백성사와 보속을 통해 죄를 용서받습니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께 제물을 드리는 제사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양을 잡아서 하느님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청하는 제사가 바로 속죄의 제사였지요.

이런 형식은 우리나라에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하늘을 달래기 위하여 제물을 바치는 제사를 지낸 적이 있습니다.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진 것도 바다의 노여움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입니다. 인당수는 물살이 아주 심하게 회오리치는 곳으로 많은 배들이 그곳에서 침몰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바다를 달래는 뜻에서 용왕님께 인신 제사를 지낸 것이지요.

구약에서도 아브라함이 하나 뿐인 자식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을 때 하느님께서 이사악 대신 양을 잡아 바치게 했던 기록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죄의 용서를 청하며 바치는 제물을 속죄양이라고 불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탈출할 때 하느님께서는 파라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하여 10가지 재앙의 징표를 보이시는데 그 10번째 재앙에서 아주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즉 이집트 안에 있는 모든 맏이를 쳐죽이는 무서운 벌을 내리신 것입니다. 이집트 안의 모든 장자를 모조리 쳐죽이는 벌을 이집트 전역에 내리시면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시기 위해서 양을 잡게 하십니다. 양을 잡아서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고 그 피를 문의 상인방에 바르면 죽음의 천사는 그 피를 보고 하느님의 사람임을 알고는 건너뛰어 갔습니다. ‘파스카라는 뜻이 바로 건너뛰다라는 의미이지요.

어린 양의 피는 이렇게 하느님께 제사를 지냈다는 증표로써 구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죽음에서 살아날 수 있었으며 노예살이에서 해방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속죄양의 역할이었습니다. 이렇게 구약에서 양은 자기를 바쳐서 하느님께 죄를 청하고 또 노예살이에서 해방시켜 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직접 십자가의 제물이 되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심으로써 속죄양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미사 때마다 사제는 예수님의 성체를 들어올리며 말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 되도다.”

이렇게 예수님을 어린양이라고 호칭합니다.

 

    예수님을 2의 모세라고 부르는 이유도 분명합니다. 이집트에서 노예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느님의 명에 따라 모세가 해방시켰듯이 로마의 노예살이, 또 죄의 노예살이를 하는 우리들을 해방시켜 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2의 모세라고 호칭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예수님을 새 아담이라고도 부릅니다. 아담이 하느님께 불순종함으로써 죄를 짓고 죽음이 들어왔다면 새 아담인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순종하여 당신을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을 새 아담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그 외에도 예수님의 많은 호칭들에는 나름대로 깊은 의미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죄의 결과로 죽음이 왔다면 그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시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셨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옛날 에덴 동산에서의 아담의 죄나 또 이천년 전의 예수님의 구원, 이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시대도 똑같습니다. 지금 여기에서도 하느님의 뜻에 따르느냐, 혹은 나의 욕망에 따르느냐에 따라서 죽음과 삶이 그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욕망을 따랐을 때 죄가 생기고 그 죄의 결과로 죽음이 오듯이 내가 지금 내 욕심대로 살고 결정했을 때 죄를 짓게 되고 그 결과는 죽음이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반면에 힘들고 어려웠으나 예수님께서 가셨던 대로 하느님의 뜻을 따랐을 때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을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경험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아담이 걸었던 욕망을 따르는 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 걸었던 생명의 길을 가야 한다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오늘 하루도 살면서 많은 부분에 있어서 갈등하고 결정하는 선택의 순간들을 우리는 맞게 될 겁니다. 욕망을 따르는 길이 더 쉽고,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줄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것은 유혹이지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만이 생명의 길임을 마음에 새기고 과감히 유혹을 이겨내는 승리의 삶을 오늘도 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