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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0주간 금요일> 안식일과 일요일

위례성모승천성당 0 23 11.01 17:06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안식일과 일요일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도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며, 병든 이웃을 마음 아파하시며 치유해 주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유독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과는 끊임없이 충돌하시고 다투시며 야단치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계속되는 갈등과 대립은 결국 극한으로 치달아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 의해 죽음으로까지 내몰리는 상황이 되셨습니다. 도대체 예수님과 그들이 그토록 부딪히게 된 사건의 발단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렇습니다 복음에 나와 있는 대로 안식일에 대한 규정 때문이었습니다. 도대체 안식일이 무엇이기에 예수님과 반대자들은 그토록 끊임없이 대립해야 했으며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궁금해집니다. 안식일이 어떤 의미이며,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가르치는 안식일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안식일이 어떻게 달랐는지 오늘 다함께 묵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안식일은 무슨 날입니까? 우리 시대로 말하면 주일, 주님의 날을 말합니다. 유다인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일요일이라고 부르는 쉬는 날과는 그 개념 자체가 다릅니다. 유다인들에 있어서는 너무나도 중요한 날로 이 날은 오롯이 하느님께 바쳐 드리는 하느님의 날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유다인들은 왜 이렇게 끊임없이 안식일에 큰 의미를 두었으며 어째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규정을 놓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들과 대립하셔야 하셨을까요? 오늘 우리는 안식일이 내포하는 두 가지 의미를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 창세기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6일 동안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7일 째 되는 날은 쉬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 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여 만드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그 날에 쉬셨기 때문이다.”(창세2,2-3)

안식일의 첫 번째 의미는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감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6일 동안은 나와 가족을 위해서 일하고 7일째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하느님을 찬미하고 거룩하게 하루를 보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요일과는 개념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안식일의 두 번째 의미는 해방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느님과 시나이산에서 계약을 맺습니다.

주님께서 이르신 모든 것을 우리가 실천하겠습니다.”(탈출19,8)

이렇게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을 맹세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를 통해서 십계명을 받게 되는데 이때에도 안식일에 대한 명확한 말씀이 내려집니다.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와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그리고 너의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탈출20,10-11)

이렛날은 야훼께서 축복하시고 거룩한 날로 삼으셨으므로 하느님의 날로 바쳐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일에는 노예도 쉬게 하고 가축들도 일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이 노예살이를 했던 그 상황을 기억하면서 해방의 날로 그 날을 축복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안식일은 창조에 대한 감사의 날이요, 노예살이에서의 해방을 기념하는 민족사적인 축제의 날이자 하느님의 날이었습니다. 안식일의 이 의미를 제대로 지킬 때 우리 삶의 모든 것은 자리를 잡게 됩니다. 개신교 교파 중에 제 7안식교라는 교파가 있을 정도로 안식일은 그 의미가 큽니다. 안식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다른 것 또한 무너지고 맙니다. 우리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미사는 우리 신앙 생활에 있어서 주춧돌 역할을 합니다. 주일미사를 한 번 빠지기 시작하면 신앙 자체가 무너지기 쉽습니다.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몇 달이 되며 몇 달이 몇 년이 되는 것을 우리는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 만큼 안식일은 우리에게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렇게 감사와 찬미, 또 시나이산의 계약을 기억하는 축제일로 지내오던 안식일에 서서히 법규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안식일을 제대로 잘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낸 규칙들이었지요. 그런데 이 법규가 점차 세분화되고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만들어지면서 서서히 사람들을 제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규칙을 만들어낸 사람들, 즉 율법 학자들의 의견이 절대적인 세상이 되었지요. 또 그 법을 실행했던 사람들인 바리사이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세분화된 율법과 그 율법을 만들어내고 실행했던 율법 학자, 바리사이들이 하느님 못지않은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힘을 얻은 사람들은 율법 본연의 정신보다는 법규의 복종만을 요구했습니다. 마음대로 사람들을 제약하고 자신들의 뜻을 합리화시키는 방법으로 안식일의 법이 변질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러한 부조리를 너무나도 잘 아신 예수님께서 그들의 안식일법을 강하게 질타하시고 꾸짖으시며 바로 잡기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안식일법에 얽힌 예수님과 율법 학자, 바리사이들의 대립이 여러 군데 묘사되어 있습니다. 대략 다섯 군데가 발전적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첫 번째는 안식일에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 주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 수가 있습니다. 갈릴래아의 한 마을 카파르나움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가 들린 사람을 고쳐 주셨는데(루카 4,31-37) 마침 그 날이 안식일이었지요.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하고 꾸짖으시니,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 그러자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하며 서로 말하였다.”(루카4,33-36)

안식일에 권위와 능력을 보이시며 더러운 귀신들을 쫓아내신 예수님의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습니다.

안식일에 관한 두 번째 장면은 마르코 복음 228, 마태오 복음 128, 또 루카 복음 61절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서 손으로 비벼먹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항의를 합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루카6,2)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시지요.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6,5)

안식일법을 어기는 예수님의 행위가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고 이제는 예수님께 사람들이 항의를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대립은 점차 극으로 달려가지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팔이 오그라진 사람을 고쳐 주시는 것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노려보기 시작합니다. 소문대로 안식일법을 무시하고 있는 예수님을 목격한 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것을 모의합니다. 이것이 안식일법의 갈등에 대한 세 번째 국면입니다.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어도 됩니까?”(마태12,10)

그들의 함정을 간파하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라도 착한 일을 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며 병자를 고쳐 주시지요. 그러자 바리사이들은 물러가서 어떻게 예수님을 없애버릴까 하고 모의합니다.

네 번째는 십 팔년 동안이나 허리가 굽었던 여인을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치유하신 장면입니다. 지켜본 회당장이 트집을 잡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꾸짖으시지요.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루카13,15-16)

예수님의 이 말씀에 반대하던 자들은 모두 망신을 당하고 군중은 기뻐했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다섯 번째 안식일 논쟁이 바로 오늘 복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역시 안식일에 수종병자를 고쳐 주고 계십니다. 물집이 생기는 수종병자를 이스라엘 사람들은 특히 부정한 병으로 여기고 터부시 했습니다. 못마땅하게 지켜보는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 물어보시지요.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루카14,3)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예수께서는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이렇게 안식일법에 대한 다툼은 결국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극한 대립으로 결말이 납니다. 자기들이 만든 규칙과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서는 율법을 변용하기도 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남들한테는 혹독하게 법들을 적용하였고 그 결과 사람을 살리는 법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법으로 안식일법을 사용하였습니다.

그에 비해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법을 무엇보다도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살리는 법으로 해석하셨습니다. 법이나 규칙을 정할 때 사람을 살리려는 법이 있고 사람을 죽이려는 법이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교육시키며 지키라고 내세우는 법은 어떻습니까?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것저것을 규제하지요. 자녀를 죽이기 위해서 규칙들을 적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원수가 상대방에게 들이미는 법은 살리는 법이 아니라 죽이기 위한 법입니다. 똑같은 법도 어떤 마음을 갖고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법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법도 마찬가지이지요. 인간을 억누르고 따돌리는 모든 법은 하느님의 뜻에 위배되는 법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끔 이것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법은 사람을 살리고 사랑하는 방향으로 적용되어야지 죽이는 법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