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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 연중 제14주일 <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

위례성모승천성당 0 125 07.06 09:34

         연중 제14주일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   


제 1독서 : 에제 2,2-5 (그들은 반항의 집안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게 될 것이다.)
제 2독서 : 2코린 12,7ㄴ-10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복    음 : 마르 6,1-6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한 본당에 주임신부의 임기는 보통 5년입니다. 한 본당에서 주임신부는 5년, 보좌신부는 2년을 지내게 되어 있고, 원장수녀는 3년, 일반수녀는 2년을 지내는 것이 일반적인 인사입니다. 특히 교구 사제의 인사에 있어서 지켜지는 원칙 중의 하나는 전체 교구를 순환하는 흐름을 갖는 것입니다. 즉, 강남에 있던 신부는 강북으로 보내고 강동에 있던 신부는 강서로 보내는 등의 이동 경로가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원칙은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다소 유동적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지켜지는 인사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사제를 그 출신지 본당으로는 보내지 않는 원칙이 그것입니다.
   즉, 고향으로 가는 것을 금기시 하는 것이지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그 곳 사람들이 파견되어 온 본당 신부의 성직(聖職)보다는 인간적인 면을 먼저 보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어땠고, 중학교 때 누구와 싸웠으며, 고등학교 때 누구네 집 딸과 친했는데 등등 사제가 되기 훨씬 전의 일들로 시작해서 여러 가지 시시콜콜한 일들이 화제 거리로 등장하기가 쉽습니다.
   친근하게 잘 알아서 오히려 좋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지요. 우선 말씀의 권위가 다른 곳 보다 적고, 서로 반대되는 의견이 표출됐을 때는 본당 신부의 결단이 필요한데 특히 토박이들은 이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출생지 본당에는 발령을 내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성직자들만의 경우는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금의환향하셨는데 사람들이 그 명성을 듣고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명성대로 가르치는 말씀에 탄복하지요.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마르6,2)
   그러나 이들은 곧 다른 지방에서처럼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신앙으로 이어가지 않고 깔보기 시작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 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마르6,3)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자기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으며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 하느님을 가르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천한 주제에 감히 자기네들을 가르치려 든다고 오히려 예수님을 경멸하지요. 그들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섭섭해진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6,4)고 하시며 아쉬움을 표출합니다. 이러한 고향 사람들의 선입견으로 인한 배척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아무 것도 하실 수가 없었지요.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마르6,5-6)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조차도 고향에서 이러한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면 왜 사제들을 자기 고향에 발령하지 않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고 지식과 경험이 미래를 위한 밑거름이 되어야 발전합니다. 그러나 과거의 지식과 경험에만 안주하여 자기 안에서 굳어진다면 본인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을 힘들게 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배우려 노력해야 하고 긍정적인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하루는 공자가 하급 관리로 일하고 있는 조카 공멸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일하며 얻은 것이 무엇이고 잃은 것이 무엇이냐?"
   공멸이 대답했습니다.
    "얻은 것은 하나도 없고 세 가지를 잃었습니다. 첫째는 일이 많아 공부를 못 했고, 둘째는 보수가 적어 친척 대접도 못 했으며, 셋째는 공무가 다급해서 친구와 사이가 멀어졌습니다."
   그 후 공자는 공멸과 같은 벼슬을 살고 있던 제자 자천에게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자천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잃은 것은 하나도 없고 세 가지를 얻었습니다. 첫째는 배운 것을 실행해보게 되어 배운 내용이 더욱 확실해졌고, 둘째는 보수를 아껴 친척을 접대하니 더욱 친숙해졌고, 셋째는 공무의 여가에 친구들과 교제하니 우정이 더욱 두터워졌습니다."


   이렇게 어떤 경우에도 긍정적이며 배우려 하는 사람은 발전합니다. 논어에 '삼인행 필유아사언(三人行 必有我師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중에 틀림없이 나의 스승이 있다는 말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긍정적인 자세로 배우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발전합니다. 그러나 남을 받아들이지 않고 비판하기만 하면 본인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주변 사람들도 힘들어집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긍정적이고 수용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반대의 모습을 보이지요. 나이를 앞세우며 가르치려 들기만 하고 남에 대해서는 비판적이기만 하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환영받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욕설은 한꺼번에 세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욕을 먹은 사람, 욕을 전하는 사람, 그러나 가장 심하게 상처를 입는 사람은 욕설을 한 그 사람 자신이다.'
   러시아 작가 막심 고리키의 말입니다. 선입견과 독설은 본인의 발전은 고사하고 주변 사람까지도 힘들게 하고 상처를 줍니다. 믿음을 방해하고 구원에로 나아가는 데 장애물이 되어버리지요. 이는 예수님 시대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시대에도 성직자, 수도자의 인간적인 면 때문에 믿음과 구원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차라리 성직자, 수도자는 화장실도 안 가고 밥도 안 먹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믿음에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직자, 수도자도 인간입니다. 최선을 다해 몸 바쳐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보통의 사람이지요. 틀린 점이 있다면 하느님께서 뽑아주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대리자이며,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인간의 능력이 아닌 성령의 능력에 힘입고, 또 신자들의 기도에 힘입어 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직자들은 자기의 능력이나 판단만으로 살지 않습니다. 자기의 능력으로 빵과 포도주를 성체와 성혈로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자기의 권위로 신자들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능력으로 빵과 포도주를 성체와 성혈로 축성하며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신자들의 죄를 용서해주는 하느님의 대리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자렛에 가셨다가 인간 예수님의 모습만을 지켜보고 반응하는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해 주실 것이 없으셨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에게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아무리 여건이 좋아도 하느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곳에서는 말씀의 능력도 치유의 기적도 드러나지 못했으며 예수님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고향을 떠나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고향을 잃게 되신 것이지요. 너무나 안타까운 결과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볼 수 있는 지혜로운 눈이 그들에게 있었다면 나자렛에는 하느님의 은총이 흘러 넘쳤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고향에 가셨고 그 어떠한 곳에서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려 노력하셨지만 그들의 불신의 장벽에 가로막혀 그 곳을 떠나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나자렛의 아쉬움이 어디에서나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가끔씩 성당에서 소란스러운 일이 발생하고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이 상처받는 일들이 일어나곤 합니다. 너무나도 인간적인 지식과 힘에만 매달린 결과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상처받고 비신자들에게도 안 좋은 표양이 되는 안타까운 경우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능력에 힘입어 살아가는 공동체에는 이러한 일들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성당 공동체는 나자렛 사람과는 달리 성직, 수도자들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믿고 존경하며 살아가고 있기에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표양들이 여기저기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성당은 신자들이 성직, 수도자들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또 성직, 수도자들은 신자들을 위해 헌신할 때 만들어집니다.
   온 세상에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랑 가득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