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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1일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과 사랑을 온 세상에 비춘 여인

위례성모승천성당 0 52 08.10 11:22

<8월 11일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과 사랑을 온 세상에 비춘 여인



   1209년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아시시에서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대부호 베드로 벨라도네라는 한 상인의 아들인 프란치스코가 뜻한 바가 있어 예전과는 달리 모든 사치를 버리고 청빈한 생활을 하겠노라고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집을 떠났던 것입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그를 정신 이상자로 간주했으나, 곧 많은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르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스티피 공작의 장녀 클라라도 끼어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3년 후, 1212년 성지주일에 아시시의 공작 스티피가의 저택 뒷문으로 신부(新婦)같이 단장을 한 어떤 귀부인이 시종으로 보이는 여인과 더불어 포르찌웅콜라 소성당을 향하여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들이 성당 앞까지 왔을 때, 성당 안에서는 수명의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이 손에 촛불을 들고 나와 그들을 영접하며 그 귀부인을 제대 앞까지 인도했습니다. 곧 엄숙한 기도와 성가가 교대로 온 장내를 울리었고, 다시 조용해지자 그 부인은 삭발을 하고 머리에 수건을 쓰고 소복으로 온 몸을 두르고 노끈으로 허리를 질끈 동여매고서는 제대 앞에 엎드렸다. 도대체 이는 무슨 일이며 그 귀부인은 누구였을까? 바로 클라라 성녀가 집을 나와 프란치스코를 따라 하느님의 길을 걷기 위하여 수녀원으로 들어갈 때의 모습입니다.
   오늘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연인으로서 혹은 정신적인 지도자로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클라라 성녀 기념일입니다. 성녀는 클라라 수녀회의 창설자이며 텔레비전의 수호자이기도 합니다.


   클라라는 이탈리아 아시시의 귀족 가문 파바로네와 오르똘 라나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빛'이라는 의미를 지닌 '클라라'라는 이름은 어머니가 기도 중에 "온 세상을 밝게 비출 빛을 낳으리라.'는 약속을 받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사순 시기에 성 프란치스코의 열정적이고 기쁨에 찬 설교를 직접 듣고 성지주일에 부모 몰래 집을 빠져 나와 프란치스코로부터 수도복을 받고 베네딕토 수도원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들이 강제로 집으로 데려가려 하자 자신의 뜻을 단호히 밝혀 부모의 애원을 뿌리쳤고, 얼마 후에는 15세가 된 동생 아녜스가 언니에게로 와서 같이 수도생활을 합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강제로라도 무장한 12명의 장정을 시켜 아녜스나마 데려오려 하였지만 클라라의 간절한 기도의 힘에 의해 끝내 무산되고 맙니다. 이들은 프란치스코가 마련해 준 성 다미아노 성당을 새로운 거처로 삼고 '가난한 자매들의 회'라는 봉쇄수도원에서 가난과 보속의 삶을 살아가는 관상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수녀들은 맨발로 지내고 맨바닥에서 자며, 고기를 먹지 않고 완벽하게 침묵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너무나도 지나친 가난과 육신의 극기 때문에 프란치스코조차 규칙을 완화시키도록 설득할 정도였지요. 그들은 자신들의 정신과 규칙을 담은 회칙을 교황님께 보내 승인을 요청했지만 너무나도 철저한 규칙 때문에 두 번이나 거절을 당합니다. 이러함 속에서도 클라라는 확고부동하게 "나는 나의 죄를 용서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의무를 면제받고 싶지는 않습니다."는 말로 육신의 극기를 통해서 오직 하느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다미아노 수녀원에서 살아가는 그들의 삶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놀라움과 칭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클라라는 식탁 옆에서까지 환자를 돌보았고 구걸하는 수녀들의 발을 씻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녀가 기도를 드릴 때는 얼굴이 너무 빛나 주변사람들이 눈이 부셨을 정도라고 전해집니다.


   클라라는 마치 성모 마리아처럼 다정한 자매요, 어진 어머니로서 수녀들과 기쁨과 아픔을 함께 하였고 수도원의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비천한 여종이 되어 겸손하게 삶을 살았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클라라의 겸손과 성덕이 알려지면서 프란치스코를 비롯한 작은 형제들은 물론이요, 교황과 추기경 및 왕과 귀족들까지 기도를 부탁하며 자문을 구하러 성 다미아노 수도원을 찾았습니다.
   가난하고 단순했으며 헌신적인 봉헌의 삶을 살았던 글라라 성녀의 거룩한 삶은 신비 그 자체였습니다. 1240년 아시시에 사라센 대군이 쳐들어왔을 당시에 클라라는 무방비 상태에 놓인 수도가족과 아시시 시민을 구하려는 일념으로 오로지 성체께 의탁하고 기도하여 이미 봉쇄 구역 안까지 밀어닥친 적군들을 물러가게 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성광을 모시고 적군 앞에 나서자, 성광에서 강한 빛이 발사되어 눈이 부신 적군들이 겁을 먹고 물러감으로써 수녀원과 도시를 구하였던 것입니다.
   또 1252년 성탄 밤, 중병으로 꼼짝할 수 없었던 그녀가 아기 예수를 경배하고 싶은 열망으로, 병실을 떠나지 않고도 2km나 떨어진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의 자정미사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기적은 1958년 교황 비오 12세가 성녀를 텔레비전의 수호자로 선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클라라는 운명하기 이틀 전에야 회칙을 겨우 승인을 받았을 정도로 엄격한 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납니다. 클라라에게 있어서 기도는 자신의 전 존재로서 하느님을 흠숭하고 사랑함이었고, 수도원의 봉쇄는 주님과 단 둘이 누리는 자유의 공간이었으며, 가난은 그리스도를 관상하게 하는 전제조건이었습니다. 모든 사람과 사물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찬미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클라라는 1253년 8월 11일 "저를 지어내시어 이 삶으로 부르셨으니 주님, 찬미 받으옵소서."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납니다. 클라라는 2년 뒤, 1255년 교황 알렉산델 4세에 의해 곧바로 시성되었으며, 1958년 교황 비오 12세는 성녀 클라라를 텔레비전의 주보로 선포하였습니다.

 

   오늘 클라라 축일을 지내면서 물질만능으로 병들어 가는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됩니다. 넘쳐나는 풍요로움 속에서도 이곳저곳에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사람들은 군중 속의 고독을 체험하며, 불안 속에 더욱 물질에 집착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믿으며 가난 속의 풍요와 완전한 자유를 누린 클라라의 삶을 본받고 실천해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과 사랑을 생각하십시오. 전심으로 그리스도께 매달려 그 거룩한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천상의 군대들이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에 불을 놓습니다. 그분에 대한 관상은 우리의 휴식이고 그분의 자비는 우리의 만족입니다."(성녀 클라라가 프라하의 복녀 아녜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madrid 1970, pp.339-3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