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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4일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지옥의 수용소를 천국으로 바꾼 예수님의 참 …

위례성모승천성당 0 48 08.12 11:45

<8월 14일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지옥의 수용소를 천국으로 바꾼 예수님의 참 제자


   제2차 세계대전이 점차 절정으로 치달아가던 1941년 어느 날의 일입니다. 콜베 신부님이 수감되어 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 14호 감방에서 죄수 한 명이 탈출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수용소에서는 죄수가 한 명 탈출을 하면 그 감방에 있던 죄수 10명을 끌어내 아사형을 내리고 마지막에는 독을 주사하여 죽이는 극형을 집행했습니다. 그 감방에서도 예외 없이 수용소 소장이 아사형에 처해질 10명을 차례차례 지명해 나갔지요.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울부짖으며 외쳤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저에게는 아내와 자식이 있습니다!" 
   처절하게 애원하며 매달렸지만 독일군은 아랑곳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죄수들 사이를 헤치며 걸어 나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콜베 신부였지요. 
    "저 사람 대신 제가 죽겠습니다." 
   순간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귀를 의심했습니다. 하루라도 더 살고 싶어 발버둥치는 그곳에서 자진해서 죽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참으로 황당한 일이었지요. 수용소 소장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콜베 신부님은 이렇게 끌려갔습니다. 10명의 죄인이 정해지면 그 아사 감방은 두려움과 절망으로 지옥을 방불케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콜베 신부님이 들어간 방의 사형수들은 서로를 돕고 격려하며, 성가를 부르면서 평화롭게 생을 마감할 수 있었습니다. 콜베 신부님은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위로해 주면서 자신이 택한 그 길을 평화롭게 따라갔습니다. 이러한 신부님의 행동은 간수들에까지도 감동을 주어 신부님은 그들의 큰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콜베 신부님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살아 계신 주님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콜베 신부님은 충동적으로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대신 죽겠습니다."하고 나선 분이 아닙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사제 생활을 하셨던 분이셨기에 그렇게 거룩한 죽음을 맞이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곳에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오늘 기념일로 지내는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는 1894년 1월 7일 폴란드 우지 근처의 즈둔스카볼라에서 출생했습니다. 콜베의 세례명은 라이문도였지만, 1910년 9월 4일 꼰베뚜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면서 막시밀리아노라는 수도명을 택하였습니다.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보나벤투라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23세에 성인은 여섯 명의 동료와 함께 신학원장 이뉴디 신부의 허락 하에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회'라는 모임을 결성하였는데 이 모임은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에게 자신을 철저히 봉헌하고, 세계의 복음화를 위해서 활동하는 일종의 신심 단체였습니다.
   1914년 11월 1일에 종신 서약을 한 콜베는 일천구백십팔년 4월 28일 사제품을 받고 1919년에는 폴란드로 돌아왔습니다. 귀국 직후 크라쿠프의 프란치스코회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기 시작하였으며, 동료 수사들은 물론 대학생과 군종 신부들 안에서 기사회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로마에서 귀국할 때부터 폐결핵을 앓고 있던 그는 결국 1년 6개월 동안 요양소에서 생활하였고, 1921년부터는 한쪽 폐로만 살아야 하였습니다. 1922년부터 콜베는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라는 잡지를 발행함으로써 매스 미디어를 통한 사도직을 시작하였는데, 매월 발행되는 이 잡지의 부수는 1939년에 100만 부에 이르렀습니다.

   1930년 그는 교황 비오 11세의 특별 강복을 받은 후 일본으로 건너가 그 해 5월 나가사키 근처에 '원죄 없으신 성모의 뜰'이라는 작은 수도 마을을 세우고, 성모와 선교에 관한 소식지인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를 발행합니다. 성인은 이렇게 6년 동안 일본 선교를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이 외에도 그는 중국, 한국, 인도에 공동체들을 세우려고 계획하였으나 외부적인 이유로 실현되지 못하였습니다. 1936년 그는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의 총책임자로 임명되었습니다. 1938년 무렵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의 분원은 전 세계에 762개나 되었습니다.


   폴란드 내에서 유명해진 콜베 신부는 1939년 독일이 침공하여 폴란드 서부 지역의 3분의 2를 차지하자, 그 해 9월 19일부터 12월 8일까지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나치에게 체포되어 수용소에 갇혔다가 곧 풀려났습니다. 1941년에 콜베 신부가 <자유>라는 기고문을 발표하자, 나치는 이 기고문을 작성하고 유대인을 도왔다는 이유로 2월 17일에 그를 다시 체포하였습니다. 처음 바르샤바의 파비악 형무소에 감금되었던 콜베 신부는, 2월 28일에 '죽음의 수용소'라고 일컬어지던 아우슈비츠로 옮겨졌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저명한 가톨릭 신부라는 이유로 더욱 혹독한 매질과 고문과 처벌을 받으면서도, 동료 수감자들에게 '증오는 파괴를 낳을 뿐이며 사랑은 창조를 낳는다.'고 가르치면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끊임없이 격려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941년 7월 말경, 한 수감자가 수용소를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나치는 한 명이 탈출하면 그 벌로 열 명을 처형하였지요. 나치에 의해 지목된 열 명의 처형자 중에는 폴란드 사람인 가조브니체크가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처형이 정해지자 자기에게는 가족과 아이들이 있다고 울부짖었고 바로 그 옆에서 이를 본 콜베 신부는 자원하여 그 대신 죽겠다고 앞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나치 지휘관인 프리츠는 이를 허락하였고, 콜베 신부는 다른 아홉 명과 함께 지하 감옥에 갇혔습니다. 나치의 처형 방법은 아사형이었습니다. 다른 동료들이 모두 죽을 때까지 2주 이상 물과 음식 없이 생존한 콜베 신부에게 나치는 결국 독극물을 주사하였고, 그는 1941년 8월 14일 아우슈비츠의 감방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랜 기간의 식음전폐에도 불구하고 콜베 신부의 정신은 또렷했고 얼굴에는 광채가 보였다고 합니다.
   독일 나치를 통한 희생자들 가운데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시복(諡福)된 최초의 인물인 콜베 신부는1982년 10월 1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자비의 순교자'라는 칭호와 함께 시성되었습니다. 콜베 신부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가장 깊었고, 또 성모 마리아에게 매우 특별한 공경을 바친 성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친애하는 형제여, …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영광을 받으셔야 마땅하신 분이므로, 비록 우리 자신이 인간적 나약성 때문에 그 분께 마땅한 영광을 드리기에 무능하겠지만, 부족한 우리 능력을 다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일차적 의무라고 생각합니다."(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의 편지에서 O. Joachim Roman Bar, O.F.M. Conv., ed., Wybor Pism, Warszawa 1973, 41-42; 226)


   성모님께 대한 완전한 의탁과 신뢰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온몸으로 실천했던 콜베 신부 기념일을 지내면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말씀을 충실히 지키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있는지 되돌아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