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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0일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내 삶의 가장 큰 원동력은 사랑입니다

위례성모승천성당 0 38 08.19 08:05

<8월 20일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내 삶의 가장 큰 원동력은 사랑입니다



   오늘은 시토 수도회의 수도승이며 교회학자인 베르나르도 아빠스 사제 기념일입니다. 그에 관해 붙여진 교황의 조언자, 제2십자군의 설교자, 신앙의 옹호자, 분열의 치료자, 수도원의 개혁자, 성경학자, 웅변가 등의 별명을 보면 대단한 활동가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미칠 수 있지만 성인은 의외로 은둔 수도회의 수도자였습니다.


   성인은 1090년 프랑스 디종 근처의 퐁텐 성에서 부르고뉴 귀족 가문 출신의 아버지 테셸랭 소렐과 어머니 알레의 7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샤티용의 생-보를 학교에서 훌륭한 학식과 재치 있는 웅변가로서의 소질을 개발하며 청운의 꿈을 펼치기 위해 문법, 논리학, 수사학을 포함한 공부를 하고 있었으나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어머니가 1107년에 사망하자, 큰 충격 속에 수도자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1112년 4월 형제들과 친척들 및 다른 귀족들을 포함한 30명의 동료들과 함께 베네딕도회의 엄격한 규칙을 따르는 시토회에 입회하여 3년 동안 규율에 따라 영적, 신학적 교육을 받았는데 이때 그는 빈혈, 편두통, 위염, 고혈압, 식욕 부진 등의 병을 얻어 평생 동안 고통을 겪었습니다. 1115년에는 시토회 대수도원장 스테파노 하르딩의 지시에 따라 12명의 동료들과 함께 랑그레에 시토 수도원을 세우기 위해 파견되었습니다.
   베르나르도는 1115년에 샬롱-쉬르-마른의 주교이자 학자인 샹포의 기욤에게서 사제로 수품 되었고, 수도원 근처의 오두막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는데 그의 초기의 저술들은 모두 이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자신의 엄격한 규율 때문에 약간의 어려움에도 봉착하였으나 그의 열심과 성덕으로 이를 극복하고 수많은 제자들을 마음으로부터 사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베르나르도의 영향으로 시토회는 변화되어 갔습니다. 이때 수도원의 이름을 발레 답신트에서 클레르보로(빛의 골짜기라는 뜻) 바꾸었고, 당시 68개 수도원의 모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베르나르도는 학덕과 지덕을 이용하여 수도원의 외부 일들을 처리하게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유럽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 중의 하나가 되어 통치자와 교황의 자문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클레르보 수도원은 엄격한 수도 생활의 모델이었고, 클뤼니 수도회 역시 성 베네딕도의 규칙을 따르는 수도회로서 대단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1119년에 베르나르도는 클뤼니 수도회가 규율적인 면에서 타락하였음을 반박하였는데 이러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았으며 애정과 상호 배려 속에 그는 클뤼니 수도회의 대수도원장인 가경자 베드로와 친분을 유지하였습니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원숙하고 활동적인 시기였던 1130~1145년에 그는 중세 그리스도교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1130년 교황 호노리오 2세가 사망하자 인노첸시오 2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어 대관식을 가졌고, 아나클레토 2세는 대립 교황이 되었습니다. 베르나르도는 인노첸시오 2세를 지지하였고 로테르 2세를 황제로 인정하도록 롬바르인들을 설득시키는 일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습니다.
  그 후 시토회는 강력한 교황의 지지를 받아 급속히 발전하게 되었으며, 시토회의 영향력이 최고 절정에 이른 때는 베르나르도의 제자였던 시토회 수도자 에우제니오 3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때였습니다. 베르나르도는 교황의 의무와 교황이 관심을 두어야 할 종교적 신비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한 <에우제니오 3세에게 보낸 제5서에 대한 숙고>를 작성하여 이를 교황에게 보냈을 뿐만 아니라, 교황이 직접 프랑스왕 루이 7세와 함께 제2차 십자군을 일으켜야 할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 순회 설교를 하도록 조언하였습니다. 교황은 베르나르도에게 전 유럽의 제2십자군들에게 설교하도록 부탁했고 그의 설교는 너무도 열광적이어서 대부대를 모으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군인들과 지도자들의 생각과 베르나르도의 이상은 너무나도 달라 이 십자군 원정은 군사적 파멸과 윤리적 타락으로 실패하고 맙니다. 십자군의 타락과 실패에 따른 양심의 가책과 엄격한 생활과 병으로 체력이 급격히 떨어진 베르나르도는 1153년 8월 20일 클레르보에서 사망합니다. 그는 20년 뒤인 1174년 1월 18일 교황 알렉산델 3세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그리고 1830년에는 교황 비오 8세에 의하여 교회 학자로 선언되었고, 교황 비오 2세는 성인의 서거 800주년을 기념하여 1953년 5월 24일 '꿀처럼 단 박사(Mellifluous Doctor of the Church)'라는 의미의 회칙을 발표하였습니다.
   그의 모든 활동의 힘은 오랜 기간의 기도와 명상에서 도움을 받은 것이고, 특히 성모님에 대한 신심 연구와 저서는 지금도 마리아 신학의 기초가 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위험과 의심과 어려움에서 성모님을 생각하고 성모님을 부르시오. 그분의 이름을 계속 부르시오. 결코 당신 마음을 비우는 것을 괴로워 마시오. 그리고 당신은 성모님의 기도의 도움을 더욱 명백히 얻기 위하여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가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마시오. 성모님의 안내를 받으면, 당신은 결코 길을 잃지 않을 것이오. 그분이 당신 마음속에 계신 한, 당신은 현혹되지 않으며 그분이 당신 손을 잡아 주시는 한 당신은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의 보호를 받는다면 당신은 아무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그분이 당신에게로 걸어오신다면 당신은 권태롭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그분이 당신에게 호의를 보이신다면 당신은 목표에 도달할 것입니다."(성 베르나르도)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시토회의 수도자 성 베르나르도는 속과 성을 함께 살면서 교회의 복음적인 삶을 위해 개혁을 부르짖고 실천하였던 하느님의 사도였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하느님만을 위해 살기를 원하고 노력했던 베르나르도 성인의 생애와 그 깊은 신심이 세상에 치우친 우리의 삶에 균형을 잡아주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하는 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