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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1일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을 새롭게

위례성모승천성당 0 45 08.19 08:15

<8월 21일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을 새롭게



    "나는 가난하게 태어났고, 가난하게 살았으며, 가난하게 죽고 싶다."
   오늘은 자신이 소박한 신분의 출신임을 잊지 않고 언제나 겸손한 모습으로 가난을 사랑하였던 성인, 교황 비오 10세의 축일입니다.


   한 가난한 이탈리아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사제가 되고, 신학교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또 베네치아와 만토바의 주교로서 그 명성을 널리 떨치다가 후일 비오 10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으로 피선된 사르토는 1835년 이탈리아 트레비소에서 우체부인 아버지와 재봉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열 명의 아이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래의 이름은 주세페 멜키오레 사르토입니다.
   특히 어머니를 통해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깊이 받으며 자라난 주세페는 1850년 파두아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858년 사제로 수품됩니다. 이어 톰볼로의 보좌 신부를 시작으로 살차노 본당 신부까지 17년 동안 교구 사제로 활동하였으며, 1884년 만토바의 주교로 임명된 후 많은 사제들과 평신도들과 접촉하며 교구의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1887년에 발표한 사목 서한에서는 후대에 근대주의라고 불린 원리와 경향들에 대하여 강하게 비난하기도 하였습니다.
   1893년 사르토 주교는 추기경으로 서임됨과 동시에 베네치아의 총대주교로 임명을 받습니다. 추기경은 가난의 영성과 사도적 열성, 전례에 대한 관심, 가톨릭 운동단체에 대한 지도 등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그는 대교구중의 하나인 자기 교구의 개혁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였으며, 인심 수습을 위해 노력했고, 과거에 반목 관계에 있던 정부와도 개선점을 찾아나갔습니다.
   가난을 사랑하였던 그가 가장 중요시 한 것은 빈민들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필수품까지 전부 빈민에게 즐겨 나누어주고 어떤 때는 생활에 곤란을 느낄 때도 많았다고 합니다.


    1903년 레오 13세 교황이 사망하자 사르토 추기경도 교황 선거를 하기 위해 로마로 상경하게 됩니다. 선거 후 바로 돌아갈 줄 알고 왕복차표를 마련했지만 그는 돌아가는 차표는 사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압도적 다수표로 새로운 교황에 당선되었기 때문이지요. 교황 선거가 시작된 후 일곱 번째 회의가 개최된 8월에 사르토 추기경은 교황으로 선출되어 비오 10세라는 이름을 갖게 됩니다.
   그는 재임기간 동안 선임교황 레오 13세가 추구하였던 사회 개혁 문제보다는 영성적인 사명에 관심을 집중합니다. 특히 신자들이 보다 충만한 기도생활과 성사에 자주 참여할 수 있도록 교회 전례와 음악을 개혁하고자 하였을 뿐 아니라 자신의 사목 경험을 토대로 어린이들을 위한 교리 교육서를 쉬운 용어로 작성하였습니다. 한편 어린이들이 첫영성체를 할 수 있는 연령을 앞당겨 성체를 강조함으로써 '영성체를 자주 하는 교황'이라는 별명이 붙여지기도 합니다.
   1909년 교황청을 개혁하고 교회 법전을 편찬하며 성무일도서 개정을 착수한 성인은 근대주의에 대항하여 '교황청 성경 연구소'를 설립합니다. 특히 당시 새로운 과학 사조와 신학이나 철학, 해석학 등의 영역에서 지식층에 깊이 침투해있던 모더니즘에 반대하며, 모든 영역에서 하느님의 권위와 하느님에 대한 순명을 강조했으며, 그 일환으로 교황권의 확장에 노력하였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의 이탈과 배교가 어느 시대보다도 심하게 일어나는 시대임을 강조한 교황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 회복시켜 그리스도가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게 하자고 호소하였습니다. 이러한 교황의 강경한 태도는 프랑스 및 이탈리아 정부와 잦은 충돌을 빚기도 하였지요. 그러나 교황은 이러한 혼란과 저항 속에서도 교황권을 자리매김 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교황 비오 10세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지 22일 후인 1914년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는 것을 개탄하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교황이 서거하자 전 세계는 겸손하고 열심한 교황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추기경단의 요청으로 엄격한 시복 시성 조사를 거친 후 그분으로부터 3대의 후계자인 비오 12세에 의해 1951년 6월 3일 베드로 대성전에서 시복되었고, 1954년 5월 29일에는 역시 같은 장소에서 시성되었는데, 이로써 교황 비오 10세는 1712년 비오 5세가 시성된 후 두 번째로 시성된 교황이 되었습니다.


   교황 비오 10세는 본질적으로 다정다감하고 이해심이 많은 사목자였습니다. 그는 교황청의 화려함에 둘러싸여 "그들이 나에게 어떻게 옷을 입혔는지 보시오."하며 한 옛친구에게 눈물을 흘리며 가난한 삶을 그리워하였고, 다른 사람에게는 "이 같은 의식을 모두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하는 것도 하나의 고행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겟세마니에서 붙잡히셨을 때와 같이 나를 군인들로 포위했다."고 말했을 정도로 소박한 삶을 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셨던 분입니다. 그의 비천한 환경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거나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평생을 소박하게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을 새롭게'라는 그의 좌우명이 말해 주듯이 그는 성경 말씀으로 하루하루를 살려고 애쓰셨던 20세기의 위대한 교황이셨습니다. 특히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성체를 자주 모시는 은총을 누리고 있는 것은 신앙을 견고히 하기 위하여 반대자들을 물리치고 신자의 영신적 양식이 되는 성체를 자주 또한 정당히 영하기 위한 회칙을 반포한 비오 10세의 특기할 만한 사적에 의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 회복시켜 그리스도가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게 하자고 호소하셨던 교황 비오 10세를 그리며 우리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더욱 부지런히 성체와 말씀을 찾게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