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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3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에 내 몸을 아끼지 않습니다

위례성모승천성당 0 56 09.02 08:16

<93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에 내 몸을 아끼지 않습니다

      

 

    우리의 교회음악 중에 <그레고리안 성가>가 있습니다. 고대 유다인들의 회당에서 부르던 찬미가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반주 없이 육성으로만 부르는 성가로써 천 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 성가의 특징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하느님을 찬양하는 전례성가라는데 있습니다. 이를 집대성한 분이 바로 오늘 기념일로 지내는 그레고리오 1세 교황입니다. 성인은 지방마다 제각각이던 미사전례곡들과 성무일도에 사용되던 시편, 응송, 찬미가들을 전례력에 맞춰 다시 정리함으로써 그레고리오 성가집을 편찬했지요.

아우구스티노, 암브로시오, 예로니모와 함께 최후의 대교부에 속하며, 라틴교부들 중의 마지막인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은 중세 교회 문화의 창설자이자 교회 학자이며, 설교가로서 교황을 일컫는 칭호, '하느님의 종들의 종'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던 겸손하신 교황이셨고, 중세 교황직의 아버지로 추앙 받다가 서거 즉시 성인이 되신 분이십니다.

 

    540년 경 로마의 부유한 원로원 가정에서 아버지 고르디아누스와 어머니 성녀 실비아 사이에 태어난 성인은 이미 그의 가문에서 두 명의 교황인 펠릭스 3(526-530)와 아가페토 1(535-536)를 배출한 명문 귀족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아버지 고르디아누스는 귀족으로 정부의 요직에 있었으나 그레고리오의 탄생 후에 가문, 재산, 고관직을 헌신짝같이 버리고 성직자가 되었던 사람인 만큼, 그들의 자녀인 그레고리오가 원래 신심이 두텁고 성덕이 출중했던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지요.

그레고리오는 법학을 포함하여 귀족 계층의 곧은 교육을 받았고, 33세가 되어 로마 시장에 임명될 정도로 뛰어난 정치 지도자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중에도 오랫동안 수도생활을 꿈꾸어왔던 그였기에 574년 경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로마 첼리오 언덕에 있던 부모의 저택을 수도원(성 안드레아 수도원)으로 만들고 그곳에 입회하여 수도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시칠리아에 있는 가족의 토지에도 5개의 수도원을 세웁니다. 이처럼 그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수도생활을 시작합니다.

573년 교황 베네딕토 1세에 의해 부제로 서품되었고, 579년 교황 펠라지오 2세는 그를 콘스탄티노플의 교황사절로 파견합니다. 590년 교황 펠라지오 2세가 사망하자 수도자로서는 최초이며 유례 없는 만장일치로 교황에 선출됩니다. 그레고리오 1세는 교황의 무거운 직책이 그의 영성 생활에 장애가 되고 있다고 고백할 만큼 아주 신심이 깊었습니다. 이러한 깊은 신심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론보다는 실천적 성향이 강하였고 출중한 행정 능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교황권의 창시자로 불릴만큼 활동적인 교황이었습니다.

 

    그는 정치외교적 수완에도 능통하여 로마에 침공한 롬바르드족과 화해하고 그 나라의 레우데린데 황후의 힘으로 그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케 합니다. 스페인을 가톨릭국으로 만들고 596년에는 수도원장 아우구스티노와 40인의 선교사들을 영국에 파견하여 앵글로 색슨족의 개종에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외부로는 도나토 이단 등을 누르고 여러 규정들을 정하여 성교회의 규율을 다져나갑니다. 특히 그는 정치적인 분쟁과 교회의 화합을 위하여 로마 교회의 주교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전 교회의 교황(Ecumenicalis Papa)'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이라는 호칭을 사용합니다. 그레고리오 교황의 이러한 태도는 교황권이 지배자의 특권이 아니라 봉사하는 특전임을 강조하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의 학덕은 어느 누구도 넘보지 못할 정도로 높았으며 사목지침서, 복음서에 대한 설교집, 에제키엘에 대한 설교집, 이탈리아 교부들의 생활과 기적에 관한 대화집, 그레고리오 전례서등 수많은 저서와 800여 통의 서한들을 남겼습니다.

그레고리오 1세는 자선사업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굶주리는 이들을 위한 식량과 필수품들을 장만하는데 노력합니다. 그는 그 방법을 모색하기 위하여 교회의 영토, 즉 교황청인 이탈리아, , 아프리카에 소유하고 있는 광대한 토지를 정리하였고 일부 지역은 관리자를 임명하여 자신이 직접 운영하면서 교회재산을 늘려 사회의 곤궁과 재난을 덜어주기도 합니다. 이는 후에 교황령에 기초를 이루었고 중세 교황의 정치령을 강화한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또한 교황은 베네딕토 수도회의 관심을 두고 수도자들에게 교구 주교의 관할권을 제한하는 특권을 부여하였는데, 이는 나중에 베네딕토 수도회가 교황의 직접 관할권에 속하고 교구로부터 벗어나 면속구를 갖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교황으로서 바쁜 생활이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구제에도 부단히 마음을 기울여 로마 시중에 그를 위한 전임위원을 두고 자선을 하였으며, 매일 열두 명의 가난한 이를 초대하여 대접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일을 위하여 일생을 헌신했던 교황에게도 세상을 떠날 날이 다가옵니다. 604312일 성인은 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성인이 집필 중에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그의 머리 위에 내려오시는 것을 보았다고 교황의 부제 베드로는 증언합니다. 그레고리오 성인의 성화를 보면 종종 성인의 귀밑에 흰 비둘기가 속삭이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에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교회는 그레고리요 교황의 활동과 인품의 위대함을 높이 평가하여 그에게 '대 교황'이라는 명칭을 붙여주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 로마 시장의 직책은 물론이요 모든 재산을 교회에 헌납하고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며 살았던 그레고리오 교황의 삶은 재산 때문에 예수님을 떠났던 부자 청년의 결정이(마태19,16-26) 얼마나 어리석은 삶이었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세상의 모든 명예와 재산을 버리고 모든 것을 바쳐 주님만을 믿고 따랐던 그레고리오 교황의 삶을 돌아보며 참된 지혜와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에게서 비롯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