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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3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아! 하느님이시여, 만사에 있어서 당신께 영광이 있어…

위례성모승천성당 0 28 09.12 10:31

<9월 13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아! 하느님이시여, 만사에 있어서 당신께 영광이 있어지이다


   이천 년 가톨릭 교회 역사 속에 가장 강론을 잘 했던 사람을 꼽으라면 오늘 기념일을 지내는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가 단연 으뜸으로 뽑힐 것입니다. '금구(金口)-황금 입'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이 그는 설교로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었고 설교로서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했다가 갖은 박해와 시련을 당했던 설교자들의 수호성인입니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며 교회학자로서 동방 교회의 4대 교부 중 한 사람으로서 안티오키아 학파에 가장 뛰어난 교부 중의 한 분이기도 합니다.


   요한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아버지 세쿤두수와 어머니 안투사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출생연도는 자세히 알 수 없고 344~354년으로 추정됩니다. 아버지 세쿤두스는 어머니 안투사가 20세 되던 해 사망했기 때문에, 요한은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일반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세속적으로 출세하기 위해서 공부하고 향락적인 생활을 하였는데, 점차 이런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후에 다르소의 주교가 된 디오도로라는 친구와 함께 성경 연구와 수덕생활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371년 안티오키아의 멜레시오 주교는 그에게 독서직을 주고 자기 곁에서 일을 하게 하지만, 평소 수도생활을 갈망했던 그는 인근 광야로 가서 은수자의 지도를 받으며 4년간 생활하였으며, 더 적극적인 수덕 생활을 열망하여 동굴에 들어가 2년 간 고행과 성경 독서의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지나친 고행으로 건강을 크게 해치게 되고 어머니의 눈물어린 간청으로 안티오키아로 돌아옵니다.
   성인은 386년 플라비아노 주교로부터 사제로 수품됩니다. 그 후 12년간 안티오키아의 설교 사제로 활약하면서 수많은 명강론을 하였고 그의 설교는 너무나도 유명하여 크리소스돔, 즉 '금구'라는 별명을 받게 됩니다. 398년 황제는 그를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 임명합니다. 그래서 398년 2월 26일 알렉산드라아의 총대주교인 테오필로로부터 주교품을 받게 되었고 수도 교구의 총대주교가 된 그는 궁중생활과 밀착되어 부패한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화려한 생활을 질타하고, 신자들의 생활 윤리를 쇄신할 것을 강조합니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구조 산업을 시작함으로서 교회의 개혁을 시도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성직매매를 한 6명의 주교를 에페소 주교회의를 통해 면직시킵니다. 이러한 요한의 개혁에 가장 극렬하게 반대한 자는 그에게 주교품을 준 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로 총대주교였습니다.


   한편 요한 주교의 황실과의 관계는 시작은 좋았지만 황제의 보좌관이었던 에우트로피우스가 실각하고 실권이 황후 에우독시아에게 넘어가면서 악화되기 시작합니다. 이유는 황후의 지나친 사치와 탐욕을 요한 주교가 비난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요한 주교의 부정과 불의에 대한 열정은 적대자들을 만들게 되었고 궤르치아 주교회의에서 적대자들의 근거 없는 모략으로 고발되어 면직되었으며, 황제는 그를 받아들여 요한 주교를 비티니아로 유배시킵니다. 그러자 신자들은 이 결정에 반발하여 폭동을 일으켰고 놀란 황후는 그의 유배를 취소해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첫 번째 유배는 오래가지 않았으며 요한은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귀환합니다.
   그러나 두 달 후 황후는 대성전 옆에 은으로 된 자신의 상을 세우고 거대한 축제를 엽니다. 요한 주교가 황후 에우독시아를 강하게 비판하자 적대자들은 황제에게 그의 주교좌 착좌식에서 교회법적인 하자가 있었다고 고발하면서 면직을 요구합니다. 황제의 주교 직무 정지 명령을 거부하자 404년 부활절 밤에 예비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있는 요한 주교를 무장한 군인들이 들이닥쳐 난동을 부리고 세례욕조를 피로 물들입니다. 황제는 404년 요한 총대주교를 쿠쿠수스로 유배보내고, 새로운 총 대주교를 임명합니다.

   이 소식이 안티오키아 교회에 전해지면서 그를 만나려는 신자들의 순례행렬이 이어지자 황제는 그를 더 먼 흑해의 동편에 있는 피티우스라는 깊은 산 속으로 유배지를 옮겨버립니다. 그는 새로운 유배지로 가던 중 407년 9월 14일 코마나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아! 하느님이시여, 만사에 있어서 당신께 영광이 있어지이다."하는 최후의 말씀을 남겨놓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그리운 하늘의 고향으로 떠났던 것입니다. 그의 유해는 438년 군중들이 도열하여 환영하는 가운데 콘스탄티노플에 영광스러이 운구되었고, 에우독시아의 아들인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는 요한의 시신에 엎드려 자기 부모가 저지른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통곡합니다.


   그후 성인의 유해는 1266년 로마의 베드로 대성전 성가대 경전에 안치되었고 1568년 교황 비오 5세는 그를 교회 학자로 지명하면서 '동방의 네 명의 위대한 교회 학자'중 한 사람이라고 선포합니다. 또한 동방 교회는 콘스탄티누스 모노마코스 이래 요한을 대 바실리오,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와 함께 최고의 성직자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서방 교회에서는 그의 축일을 시신 이장 기념일인 1월 27일에 지내왔으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에 의해, 9월 14일이 십자가 현양 축일인 관계로 그의 사망일(9월14일)에 가까운 9월 13일에 옮겨져서 기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는 '금구'라는 별명에 걸맞게 엄청난 양의 명강론들을 남겼습니다. 총 6권으로 된 <사제직>이라는 저서는 요한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오늘날까지 고전으로 많이 읽히고 있습니다. 저자와 친구 바실리오와의 대화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사제직의 고귀함과 이에 요구되는 사제들의 덕행에 대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의 사후 몇 년이 지나 이시도로 페루시아타는 이 저서를 읽고 다음과 같이 소감을 썼습니다. 
    "이 책을 읽고 하느님께 대한 불타는 사랑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사제직이 얼마나 고귀한지, 그렇지만 얼마나 어려운 직분인지를 말해주고 있으며, 그 직을 적절히 수행하기 위해서 사제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외에도 238통의 편지를 남겼고 451년 칼체돈 공의회에서 교회 박사로 선언되었고, 교황 비오 10세 의해 설교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습니다.
 
   황후에 대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직설적인 비방에 대해 어떤 처벌을 내릴 것인가를 토의하기 위해 동로마 황제의 법정이 개정되었을 때 다음의 가능성들이 제시되었다고 합니다.
   첫째, 그를 감옥에 넣는다. 그러자 그들은 말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기도할 기회를 갖고 그가 항상 바랐던 대로 주님을 위해 고통을 받을 것이다."
   둘째, 그를 추방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주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 없다."
   셋째,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린다.
    "그러면 그는 순교자가 될 것이고 주님께 가려는 그의 열망을 만족시킬 것이다. 즉 그 어느 것도 그에게 처벌이 되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그는 그것들을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다."
   넷째, 죄를 짓게 한다.
    "세상에는 그가 대단히 두려워하고 온몸으로 미워하는 것 한 가지가 있다. 죄가 그것이다. 그러니 그가 죄를 짓게 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오직 죄 짓는 것만이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는 자신의 출세와 여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가장 큰 능력인 설교를 통해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불의를 바로잡는 일에 헌신하신 분이었습니다. 성인의 일생을 묵상하며 우리의 재능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지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