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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5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성모님의 마음에 새겨진 예수님의 수난

위례성모승천성당 0 46 09.14 10:47

<9월 15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성모님의 마음에 새겨진 예수님의 수난


제 1독서 : 히브5,7-9 (순종을 배우신 예수님께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복    음 : 요한19,25-27 (아들 수난 보는 성모, 맘 저미는 아픔 속에 하염없이 우시네.)


   보통의 어린 아기들은 하루에 평균 400번 정도를 웃는다고 합니다. 그에 비해 40세가 넘는 어른은 하루 평균 15번을 웃는답니다. 물론 더 많이 웃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번도 안 웃는 사람도 있고 화만 내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요. 웃는 것이 건강에 좋다는 것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5분을 웃으면 5시간을 운동한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또 사람의 얼굴 표정은 인체 내 위장의 모습과 같아서 찡그린 인상을 가진 사람은 위의 모양도 찌그러져 있다고 합니다. 웃는 것이 이렇게 건강에도 좋고 보기에도 좋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잘 안 웃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어제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었고 오늘은 '성모 마리아 고통 축일'입니다. 이러니 웃을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어제는 주님의 십자가를 기념하고 오늘은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는 것은 성모 마리아께서도 아드님의 십자가 길로 고통을 함께 걷고, 아파하셨기 때문에 오늘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로 지내는 것입니다. 
   천주교는 밝고 활기 찬 분위기보다는 절제되고 엄숙한 분위기를 요구함으로 신자들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불교와 개신교, 천주교의 신자나 성직자들의 모습과 분위기는 조금씩 다 다릅니다. 불교 신자나 스님의 모습을 떠올리면 부처님의 모습을 닮은 늘어진 귀와 편안한 얼굴, 불룩 나온 배가 먼저 연상이 됩니다. 또 개신교 신자와 목사님을 생각하면 활기차고 밝으나 좀 가벼운 듯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지요. 그에 비해서 천주교 신자와 사제, 수도자들의 모습은 일반적으로 무겁습니다. 밝고 활기 차기 보다는 근엄하고 절제된 분위기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내의 가르침과도 무관하지 않지요. 우리 천주교는 끊임없이 고통을 강조하고 희생을 요구하며 드러내기보다는 감추고 절제할 것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마치 천주교 신자는 오히려 고통을 좋아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십자가의 고통을 묵상하게 하고, 성당에만 가면 무릎을 끊고'내 탓이오'를 외웁니다. 그렇게 고독한 수도자 같은 인상을 쓰고 있어야지 아주 신심이 깊은 신자라는 느낌이 오는 것도 같습니다. 하느님 앞에만 서면 왜 이렇게 작아지고 주눅이 들게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신자가 되면 지켜야 할 것은 왜 그리 많습니까? 신앙 생활을 오래한 할머니들은 이렇게도 이야기합니다.
    "신부님, 용서해 주세요. 사는 게 다 죄지요."
   이러니 웃을 일이 있겠습니까? 마치 부활이 없는 십자가만의 신앙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신앙의 핵심은 궁극적으로 십자가의 신앙이 아니고 부활의 신앙입니다. 십자가는 부활에 이르기 위한 과정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죽음을 넘어선 부활은 영광이고 기쁨이며 그 자체가 희망입니다. 그래서 부활을 믿는 신앙인은 궁극적으로 기쁨과 희망과 영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신앙인은 어떠한 경우에도 실망하지 않고 어떠한 난관 속에서도 희망의 싹을 찾아내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슬픔과 어려움이 닥쳐와도 부활의 그 날까지 인내하며 주님 안에서 기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신앙인인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성당에만 오면'내 탓이오'하면서 죄인이 되어버립니다. 결코 바른 모습은 아니지요.

   교회는 왜 예수님과 성모님의 극심한 고통의 순간들을 '성모 통고 축일'이나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등으로 다양하게 경축하며 기념하고 기리는 것일까요? 이유가 있지요. 우리의 삶은 그렇게 부활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십자가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인간은 고통의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고 그것을 지나서만이 부활의 영광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면 성숙할 수도 없고 발전할 수도 없습니다. 즐겁고 좋은 일만 있다면 사람은 턱없이 교만해지기 십상입니다. 고통 안에서 인간의 본질과 하느님을 깨닫게 되지요.
   모순과 한계를 지닌 인간의 삶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는 고통들을 겪으며 우리는 부활을 희망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로마5,3-4)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 바오로 사도 역시 고통 중에 바라보는 희망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시련과 고통이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기쁨과 희망을 잉태하는 바탕이 된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큰 십자가를 일생 지신 분이십니다. 루카 복음에서 시메온은 성모님께 이런 예언을 하고 있지요.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2,35)
   이 예언처럼 일생을 하느님을 위해서 또 아들 예수님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사신 분이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는 어려움을 겪었고, 아이를 낳자마자 먼 이집트로 피신을 가야했으며, 그 아들이 십자가 처형을 선고받고 골고타 언덕으로 끌려가는 길을 함께 걸으셨고, 오늘 복음에서 알 수 있듯이 마침내는 십자가에서 절규하면서 죽어 가는 아들을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참으로 처절한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이 모든 고통을 하느님 안에서 순명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과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듯이 성모님께서도 마찬가지로 하느님과 아들이신 예수님,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이 고통들을 극복해 내시고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셨습니다. 부활을 희망하고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에 그 고통이 부활로 승화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고 어떠한 믿음도 없는 고통은 처절하고 단지 허무할 따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시대가 고통스럽다고 이야기하지만 시실 우리는 너무나도 기름진 삶 속에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고통스러운 것뿐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속에서 만들어지는 어려움은 우리에게 희망과 부활을 제시해주지만 나의 욕심을 따르는데서 생기는 어려움들은 결코 부활을 잉태하지 않습니다. 나를 죽이고 이웃을 죽이고 모두를 죽이는 파멸을 가져올 뿐이지요. 반면에 세상을 살면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겪게 되는 모든 고통들을 성모님과 예수님처럼 승화시킬 때 그것은 단지 허무한 시련이나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자 부활입니다. 나를 살리고 너를 살리고 모두를 살리지요.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 잎새>로 유명한 소설가 오 헨리 역시 시련과 고통을 승화시킨 사람입니다. 오 헨리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학교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습니다. 카우보이, 점원, 직공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은행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지요. 그러나 곧 공금횡령죄로 체포되어 3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3년이란 절망적인 시간을 보내면서 헨리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 깊이 이해를 하고, 인간이 갖고 있는 위대한 가능성을 깨달았지요. 결국 복역이라는 고통은 한 평범한 사람이 훌륭한 작가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석방된 뒤 헨리는 감옥 생활을 하면서 얻은 풍부한 감성과 경험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작가 생활에 들어갔습니다. 불과 10년 남짓한 작가 활동 기간 동안 그는 무려 300여 편에 가까운 단편소설을 썼습니다. 가난한 서민과 빈민들의 애환을 다채롭게 그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가 되었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의미한 고통 속에서도 나를 찾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도 예외 없이 생로병사의 과정 속에서 크고 작은 고통들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고통이 하느님과 나를 발견하는 계기가 된다면 새로운 삶을 찾아내는 희망으로 열매 맺을 수 있지요. 피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고통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에는 죽음이라는 극한적인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유한한 우리 인간이지요.
   처절한 십자가 밑에서의 절규 속에서도, 그리고 장사 지낸 지 사흘이나 지나 더 이상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곳에서도 하느님의 뜻 안에서 희망을 잃지 않았던 성모 마리아의 믿음을 우리는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성모님께서 그 모든 고통을 승화시켜 부활에 동참하셨듯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성모 통고 기념일의 의미이지요.


   오늘 하루도 그렇게 마음 편한 시간만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웃으며 밝게 지내야 하겠지만 부딪히는 많은 문제들로 어찌할 바 모를 괴로움에 처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성모 마리아의 고통에 비한다면 그것은 별 것 아닐 수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결국 승리하셨고 부활에 동참하셨듯이, 믿고 노력한다면 우리 역시 부활의 영광에 이를 수 있음을 여러분과 함께 경축하는 뜻 깊은 날입니다.
어려움 중에도 기쁘게 노력하고 희망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