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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7일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내 삶의 모든 의미입니다

위례성모승천성당 0 35 09.26 11:07

<9월 27일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내 삶의 모든 의미입니다


   오늘은 가난한 이들은 우리의 주인이라며 스스로 그들의 종이 되기를 자청했던 자선 사업의 수호 성인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당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의 창구로 "빈첸시오회"를 두고 있고 빈첸시오 회원들은 일년 365일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애를 씁니다. "빈첸시오 아 바울로회"는 1833년 프레드릭 오자남 신부가 창설했지만 빈첸시오 드 폴 신부의 정신을 그 중심에 두고 창립되었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입니다. 뿐만 아니라 빈첸시오 성인은 "라자로회"라고 불리기도 하는 선교 사제회와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의 설립자이기도 합니다.
   성인은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의 주님이시고 스승이라고 가르치셨고, 이것이 존경심과 헌신하는 마음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해야 하는 이유이며, 가난한 이들을 찾아갈 때는 겸손과 소박과 사랑으로 해야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요안나, 이제 알게 되겠지만 사랑이란 무거운 짐이란다. 국냄비나 가득 한 빵 바구니보다 더 무거운 거지... 그래도 친절과 미소는 늘 지켜야 해. 국하고 빵을 나누어주는 게 전부는 아니야. 그거야 부자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 너는 가난한 이들의 작은 여종이야. 언제나 미소짓고 좋은 마음으로 지내는 '사랑의 딸'임을 잊어서는 안 돼. 네 주인은 가난한 이들이야. 그들이 무척 과민하고 까다로운 주인이라는 걸 곧 알게 될 꺼야. 그들의 몰골이 추하고 더러울수록 부당하고 상스럽게 굴수록 너는 그만큼 더 그들에게 사랑을 주어야 해. 네가 주는 빵을 가난한 이들이 용서하는 것은 네 사랑을 보아서, 오직 네 사랑을 보아서일 뿐이란다."('사랑의 딸회'의 첫 수녀를 일터로 내보내며 빈센시오 사제가 당부한 말)
  
   빈첸시오 성인은 1580년 프랑스에서 가난한 농장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가축을 치는 등 집안 일을 도우며 성장하였습니다. 12세가 되었을 때 그의 탁월한 재주를 아깝게 생각해 오던 아버지는 그를 근방의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맡겨 교육을 받게 했는데 그는 거기에서 4년간이나 학문과 고행에 열중한 후 수도원장의 알선으로 어느 변호사의 가정에 유숙하면서 닥스 대학교와 툴루즈 대학교에서 수업한 후, 1600년에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학문의 연구를 계속하며 사제 생활을 하던 중 어떤 부인의 기금을 받기 위해 마르세이유에 갔던 그는 돌아오는 중에 이슬람의 해적들에게 붙잡혀 튀니지에서 노예로 팔려 가는 불운을 겪게 됩니다. 빈첸시오 사제는 노예 생활 동안 어부를 만나기도 하고 연금술사를 만나 여러 가지 병을 치유하는 방법을 배우기도 합니다. 또 다른 곳에 노예로 팔려간 빈첸시오는 자기를 산 사람이 신자였음에도 믿음을 잃고 불행한 배교자가 된 것을 알고 그를 설득하여 교회로 돌아오게 하였으며 이 덕분에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어 1607년 아비뇽으로 가서 교황의 부특사인 몽토리오 주교 앞에서 회개를 선서하게 됩니다.
   빈첸시오가 배운 치료 방법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몽토리오 주교는 그를 로마로 데려갑니다. 그곳에서 1년 동안 신학을 공부하면서 로마의 고위 성직자들과 친분을 맺게 되고 호의도 받게 됩니다. 1609년에는 이혼한 프랑스 왕비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의 궁전 전담 신부가 되었으며 궁중 생활을 하면서 귀족들의 문학 모임과 과학자들의 모임에도 참석하게 됩니다. 그러나 빈첸시오는 화려한 생활 중에서 노예 생활 때 겪었던 고통을 기억하고 수입의 일부분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1610년 프랑스의 오라토리오회를 설립하러 온 베륄 신부와의 만남은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훗날 추기경이 된 베륄 신부는 사망할 때까지 그에게 영적 지도를 받게 됩니다. 1611년 빈첸시오 사제는 파리 근처의 클리시의 본당 신부로 임명받아 사목활동을 하면서 신자들의 기도 생활에 감명을 받아 신부로서의 사명감을 재인식하게 됩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았던 빈첸시오 사제는 1617년 리용 근처의 샤티옹 레 돔브 읍의 본당 신부로 임명되면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애덕회"를 설립합니다. 성인은 특히 미사 집전 전에 본당 내의 궁핍한 가정을 신자들에게 얘기하면서 돌보아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이 말을 들은 신자들은 그 집에 가서 봉사를 하곤 했습니다.
   한편 1617년 파리에서 제네바의 주교인 프랑스와 드 살을 만난 빈첸시오는 그의 온유함과 겸손함에 큰 감명을 받게 됩니다. 그의 생애에 있어서 베륄 신부와 프랑스와 드 살 주교는 아주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베륄 신부가 그에게 영적 생활을 가르쳤다면, 프랑스와 드 살 주교는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을 증거하는 모범으로 비춰졌습니다. 파리의 방문 수도회를 설립한 프랑스와 드 살 주교는 이 수녀회의 영적 지도를 빈첸시오에게 맡기게 됩니다.
   1625년 말에 빈첸시오는 남편이 죽은 후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봉사하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루이즈 드 마리약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도신부가 되어달라는 루이즈의 청을 받아들였으며, 루이즈를 통해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신심 깊은 처녀들을 선발하여 그 당시의 봉쇄 생활을 하던 수녀회와는 다르게 "애덕의 수녀회"를 창립하여 초대 원장으로 루이즈를 임명하였습니다. 이것이 현재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라고 불리는 수녀원입니다.
   빈첸시오 사제는 1643년 루이 13세가 사망하기 전에 그에게 고해성사를 청할 만큼 궁정 생활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으며, 1648~1652년에 두 차례에 걸쳐 발생한 프롱드의 난 때에는 중재 역할을 수행하면서 고통받고 있는 서민들을 위해 전력을 기울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노력 끝에 빈첸시오 드 폴은 1660년 9월 27일 파리에서 사망하여 라자로회의 파리 본부의 모원에 묻혔으며, 1737년 클레멘스 12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고, 1885년에 레오 13세 교황에 의해 모든 자선사업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습니다.

   빈첸시오 성인은 원래 아주 성미가 급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만약 하느님의 은총이 없었다면 나는 딱딱하고 거칠고 까다로운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는 빈첸시오 드 폴 사제는 원래 타고난 성격은 급하고 거칠었지만, 하느님 안에서의 끊임없는 수련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그를 가장 자비롭고 후한 사람으로 변모시켰습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로 점철된 성인의 삶은 끊임없는 회심과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완전한 신뢰에 바탕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인의 생애는 파란만장하다는 말로 표현될 정도로 역동적이었습니다. 노예 생활에서 왕의 고해성사 사제가 되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함께 했던 분이지요. 성인은 예기치 않은 사건들 안에서 가난한 이들의 외침을 들었고, 하느님 현존에 대한 예민한 감각으로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깨달았습니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과 만남 속에서도 예수님께서 가장 관심을 가지셨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으셨던 성인의 삶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빈첸시오 성인의 생애를 되돌아보며 아무리 풍요하고 화려한 생활을 한다 해도 하늘 나라에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만이 영원한 상급이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겨봅니다.



<자선 사업의 수호 성인 빈첸시오 드 폴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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